제9호 [UT 구성원 인터뷰]🎤Richard A. Pennington (HIS '76) 동문
이번에는 한국에서 오래 거주하고 있는 텍사스 출신의 Richard A. Pennington (HIS '76) 동문을 인터뷰했습니다.
🎤 텍사스 토박이로서, 지금도 가장 ‘고향 같다’고 느끼는 텍사스의 지역이 있나요?
댈러스에서 나고 자랐으며, 오스틴에서 30년을 보냈습니다. 그 외에도 덴턴(Denton), 내커도처스(Nacogdoches), 켄터키, 노스캐롤라이나, 미시간 등 여러 곳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에게는 그 어느 곳도 고향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18년 반을 지내는 동안 “향수병은 없으세요?”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습니다. 제 대답은 늘 같습니다. “딱히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 (David Bowie의 노래 가사 한 구절을 빌리자면 말입니다.) 물론 진짜 멕시코 음식에 대한 그리움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멕시코 음식을 찾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면서 오히려 모교에 대해 더 자주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UT 동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물론 지금의 UT는 제가 다니던 시절과는 매우 다른 학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히 같은 것은 없으니까요.
🎤 UT에서의 경험은 이후 글쓰기, 역사, 미식축구와 스포츠, 문화, 여행에 대한 관심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역사학을 전공했고 1976년에 졸업했습니다. SXSK 독자들 중 많은 분들에게는 아주 먼 옛날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저 역시 그렇게 느끼곤 합니다. 역사 공부는 미국뿐 아니라 한국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 주었습니다. 비무장지대(DMZ)부터 제주도 남쪽 해안까지, 서쪽의 백령도부터 동쪽의 독도까지 한국 곳곳을 다녔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고, 산을 오르고, 마라톤을 뛰고, 현대식 결혼식과 전통 혼례에도 참석했습니다. 또한 한국 역사와 문화에 관한 책도 수십 권 읽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제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스포츠 이야기도 하셨는데, 스포츠는 제게 늘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다만 한국에 온 이후에는 이를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보다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고등교육에 대한 대형 스포츠, 특히 미식축구의 영향력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상황이 되고 있는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여러 권의 책을 집필·출간하셨습니다. 글쓰기는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글쓰기를 정말 좋아합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참고로 저는 논픽션만 읽고 쓰는 사람입니다. 주제를 정하고, 자료를 조사하고, 글을 쓰고, 그것을 매끄럽게 다듬어 가는 전 과정을 좋아합니다. 그 모든 과정이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다소 자만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지금이 글을 가장 잘 쓰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의 롱혼(Longhorn)이었을 때처럼 빨리 달리거나 높이 뛰거나 우아하게 춤출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글쓰기만큼은 지금도 자신 있습니다.
제 글과 책을 읽은 분들은 제가 어떤 생각과 편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 있죠. 아마 이번 인터뷰에서도 몇 가지는 드러났을 것입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자면, 제 이름은 구글에서 꽤 많은 검색 결과를 남기고 있습니다. 주로 제가 쓴 책들과 제 웹사이트(www.richardpennington.com)의 블로그에 올린 수백 편의 글 덕분입니다. 제가 써서 공개한 글들 때문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이메일을 받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오랜 친구일 수도 있고, 우연히 제 글을 읽고 질문이나 의견을 전하고 싶은 낯선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구글의 AI 기능이 저를 언급하는 것을 보는 일도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 오랜 기간 전문 편집자로 일해 오셨습니다. 처음 편집 업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며, 무엇이 오랫동안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들었나요?
글쓰기와 편집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당연히 제 글을 직접 편집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쓴 마케팅 자료, 기사, 책, 박사학위 논문 등을 검토하거나 수정해 달라는 요청도 자주 받습니다. 제가 본 문서 중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개선할 수 없는 문서는 거의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강남의 한 지식재산권 법률사무소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실제 업무는 매우 전문적이고 때로는 지루하기도 하지만, 오류와 불일치를 바로잡고 모순점을 찾아내는 일을 좋아합니다.
🎤 문법이나 문체를 고치는 것 외에, 좋은 편집자는 어떤 기여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질문에 정확히 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세부 사항을 놓치지 않는 예리한 관찰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편집과 글쓰기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독서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책을 읽습니다. 연평균 약 60권 정도를 읽고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읽고, 쓰고, 편집하는 일을 계속해 왔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수정하는 것입니다.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저자가 아닙니다. 저자가 당신입니다. 이 글에는 제 이름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 텍사스에서 성장하셨고, 한국은 이제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습니다. 한국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처음 한국에 온 것은 2007년 11월이었고, 이유는 아주 현실적이었습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구에서 14개월 동안 활기 넘치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후 더 적합한 직장을 찾아 서울로 옮겼습니다. 현재 저는 73세이며, 여전히 건강하고 행복하게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많은 친구들은 제가 외국으로 훌쩍 이주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처음에는 필요에 의한 선택이었지만, 지금은 제 의지에 의한 선택입니다.
저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한국에 기여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코리아타임스에 격주 칼럼을 연재했으며, ‘직지를 한국으로 되찾아오기 위한 위원회(Committee to Bring Jikji Back to Korea)’라는 NGO의 대표를 맡기도 했습니다.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직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최초로 발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실물 증거입니다. 직지는 1377년 청주의 한 사찰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긴 이야기지만, 현재 이 귀중한 문화유산은 프랑스 파리의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저와 동료들은 직지 반환을 위해 프랑스 정부와 한국 정부,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모든 곳에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TV(아리랑TV)와 라디오에 출연했고, 팟캐스트도 제작했습니다. 8,000명 이상이 서명한 청원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프랑스 대사는 우리의 청원을 전달하기 위한 면담 요청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활동은 중단되었지만, 직지를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공적 의제로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노력의 결과가 어느 정도는 실패였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해낸 일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저는 매년 3월 1일이면 탑골공원을 찾아 1919년 독립선언서 선포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현충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이렇게 참여하는 외국인은 매우 드뭅니다.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한국 곳곳을 여행하셨는데, 특별히 의미 있게 기억에 남는 장소가 있나요?
이 역시 여러 번 받아 본 질문입니다. 아마도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가장 평화로운 장소 중 하나는 보성 대한다원 녹차밭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곳을 방문한 지는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마치 어제 다녀온 것처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